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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활용해 책 쓰는 게 잘못된 걸까?
(아래 링크 원문 발췌)
오늘날 음악가들은 기술적 도구를 사용하는 데 더 이상 어떤 제약도 없다. 환상적인 곡을 만들기 위해 음악 이론을 알 필요도 악기를 소유할 필요도 없다. 신디사이저와 샘플을 사용해 노브를 돌리면 화음을 변조할 수 있고 드롭다운 메뉴에서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선택할 수도 있다.
지구상의 그 어떤 악기로도 만들어 본 적 없는 소리를 작곡할 수 있고 사람들은 기꺼이 그들을 따라 새로운 음향의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다.
전통적인 악기들이 완전 대체된 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어쿠스틱 연주를 즐긴다. 하지만 이들은 훨씬 더 거대한 합성 음악의 풍경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처음 전자 음악이 나왔을 때 음악가들의 자리를 빼앗을까 봐 우려했다. 많은 청취자들은 전자 음악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잘못된 것이라고 느꼈다. 일종의 기만이며 음악 자체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우려들은 모두 타당했다.
하지만 민주화, 창의성, 취향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는 무색해졌다. 결과적으로 전자 악기로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만들 수 있었고, 그들은 영리하게 재미있고 공감 가는 방식으로 활용했으며, 청취자들은 결과물을 좋아했다.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AI로 만든 예술은 무작정 가짜이거나 나쁘다고 말하는 건 설득력을 잃게 될 것이다. 무엇이 예술인지 결정하는 것은 도구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소설에 관한 한 AI가 평범한 도구가 아니며 예술적 삶 속에서 그 자리가 없다고 결론지을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AI를 사용한 시도가 늘고 있다. 소설 또한 음악과 마찬가지로 관대한 예술 형식이기에 그런 시도가 독자들에게 성공할 수 있다.
물론 좋은 노래가 리듬감은 뛰어나지만 멜로디는 뻔할 수 있는 것처럼, 소설도 어떤 측면에선 통하지만 다른 측면에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독자들이 자신을 감동시키는 뭔가-서스펜스, 아름다움, 리얼리즘, 판타지, 심지어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공감 가는 주인공-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부분적인 성공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소설 창작이 다층적인 작업이라면-전제, 줄거리, 문체 등이 어느 정도 분리될 수 있다면- 모든 층위를 반드시 한 사람이 만들어야만 할까? 다양한 분야의 현역 작가들은 이미 답을 내렸는데, 그들은 종종 집단이나 팀을 이뤄 작업한다.
미국에서 팔리는 양장본 소설 17권 중 1권을 집필하는 제임스 패터슨은 협력자들에게 상세한 개요와 기획안을 제공하는 식으로, 이른바 ‘소설 공장’을 운영하며 이를 해내고 있다. 30개 프로젝트를 동시 감독하며 연 15권의 책을 출간하기도 한다.
그런 그를 순수 문학 범주에서 배제시키고 심지어 그가 과연 작가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는 맥락에 따라 달라지며 그 기대는 암묵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부커상 수상 소설을 읽을 때는 모든 단어가 저자 혼자 쓴 것이라 기대하지만, 저널리즘을 읽을 때는 작가와 편집자 모두가 역할을 했다고 가정한다. TV 드라마는 대개 작가 집단에 의존한 대본으로 제작된다. 시나리오 작가가 오스카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할 때도 크레딧에 이름이 오르든 안 오르든 수많은 사람이 최종 결과물에 기여했을 수 있다. 어쩌면 영화처럼 본질적으로 대규모 협업 프로젝트인 경우 우리는 작가 간 협업에 더 열린 태도를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들이 AI를 활용해 자신만의 ‘공장’을 가동하게 될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AI 도구를 이용해 수백 편의 소설을 단숨에 집필하고 수십 개 가명으로 아마존에 자비 출판해 온 로맨스 소설가도 등장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시스템에 프롬프트를 입력하면 45분 만에 사람이 수정할 수 있는 초안이 완성된다고 했다. 이 방법으로 큰 수익을 올리는가 하면, AI를 활용한 로맨스 소설가 지망생을 위한 온라인 강좌도 열고 있다.
이것이 암시하는 미래는 비인격화된 산업 규모의 소설 생산에서 작가는 쇼 기획자가 되어 AI 작가진을 감독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물론 한 가지 위험은 이런 소설의 독자들은 자신이 읽는 작품의 제작에 누가 혹은 무엇이 관여했는지는 알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독자들이 의존하는 암묵적인 이해를 훼손할 수 있다.
대량 생산이 AI가 제공하는 유일한 선택지일까? 목표와 관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저널리스트이면서 초보 아마추어 음악가인 나는 기술이 내 음악의 생산성을 높여주는 걸 확실히 느꼈다.
나는 음악 기술을 활용해 내가 원하는 곳에 도달하려 한다. 나는 관객 앞에서 내 노래를 연주할 수 없다. 피아노는 실수 없이 12마디 정도밖에 연주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게 내 목표는 아니다. 나는 단지 머릿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큰 소리로 듣고 싶을 뿐이다. 나의 비전을 실현하고 싶은 것이다.
많은 작가 지망생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들은 아이디어가 있고 실현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들에겐 자극과 도움, 템플릿, 초안이 필요하다. 물론 작가에게서 우리가 기대하는 건 그의 ‘진짜’ 능력이다. 하지만 그 ‘진짜’란 뭘까?
음악의 경우 수많은 비공개 도구가 전문 음악가들을 지원해 즉흥적인 아이디어에서 완성된 곡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이 음악의 본질을 파괴한 것일까?
글쓰기는 다르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이런 견해를 가질 수 있으며 나는 그 견해에 공감한다.
나는 글쓰기로 생계를 유지한다. 글쓰기라는 개념 자체와 AI 없이 직접 글을 쓰는 행위 모두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나는 훌륭한 글이 무엇인지에 대해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내 직업을 물으면 저널리스트라고 답한다. ‘작가’라는 단어에는 값하지 않는다고 느껴서다.
나는 평생에 걸쳐 저널리스트로서 기술을 익히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런 글쓰기에서 본질적으로 기술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능숙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높고 영감 넘치는 글쓰기의 차원-상상력, 예술성, 영감의 측면은 다소 손에 닿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글쓰기라는 행위가 무엇이든-어렵고 신비롭고 중요하고 심지어 다양한 포스트모던적 방식으로 ‘불안정’할지라도-그것이 동시에 직접적이며 분명하다는 사실을 (대학원에서의 치밀한 독해 훈련과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다른 예술 형식에서는 창작자의 역할이 더 복잡할 수 있고 작품의 지위도 더 유동적일 수 있다. 예술가들은 온갖 방식으로 기술을 활용해 자신의 한계를 넓히고 예술과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글쓰기는 이 모든 것에서 대체로 예외라고 나는 생각했다. 작가의 역할을 조정할 수 있는 실험 문학도 있었고 대중 소설에서 저작권은 유연한 개념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짜’ 글쓰기, 문학적 글쓰기는 여전히 단순했다.
이제 AI가 글쓰기의 벽을 허물면서 그 단순함은 더 이상 당연시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한때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던 전통적 접근 방식의 장점들이 이제는 더욱 더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오토튠이나 AI 합성 기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완벽함과 불완전함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
기술로 다듬어진 인간의 결함은 나름대로 완벽해지고, 기술을 통해 만들어진 매끄러운 표면은 텅 비고 특징 없는 느낌을 줄 위험이 있다.
2009년 Daft Punk의 토마스 방갈터Thomas Bangalter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술과의 관계는 매우 애매모호한데 이는 매우 강렬한 애증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기술에는 더 이상 한계가 없다.” 그러나 이어서 이런 말도 했다. “어떤 종류의 인간 행동이든 일종의 좌절감과 맞서야만 한다.”
기술은 창작 과정을 확장시킬 수 있지만 동시에 바로 그 기술이 창작 과정을 단절시킬 위험도 안고 있다. 방갈터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할 것은 절제, 즉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