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੭ 서봄

462 posts

꜀(^. .^꜀ )꜆੭ 서봄 banner
꜀(^. .^꜀ )꜆੭ 서봄

꜀(^. .^꜀ )꜆੭ 서봄

@_drizzle9

小兔兔 | 我儘姫 | 纯元哥

큰 종이학 껌딱지 Katılım Ekim 2025
74 Takip Edilen77 Takipçiler
꜀(^. .^꜀ )꜆੭ 서봄 retweetledi
꜀(^. .^꜀ )꜆੭ 서봄
※특정 캐릭의 해석이나 분석은 아니라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써둔 걸 뒤적거리다 재밌는 결론에 도달해서 쓴 글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개인적인 망상에 가까운 검증되지 않은 글입니다. 나는 어떤 작품이든 던지고 싶은 하나의 질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느끼기에 《러브앤딥스페이스》는 대의를 위한 개인의 희생은 정말로 숭고하고 아름다운가? 이다. 많은 작품에서 영웅은 대단하고, 완벽하고, 이상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보통의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선의 극점에 선 사람. 남들이 망설이는 순간에도 앞으로 나아가고, 남들이 외면하는 고통까지 기꺼이 끌어안는 사람.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좋아한다. 나 역시 그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스스로를 내던져 누군가를 구하는 서사에는 분명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일과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일은 전혀 다르다. 희생이 감동적인 이유는 일반적인 사람은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해를 입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 선택을 한 개인을 존중할 수는 있다. 타인이 보았을 때 이런 사람들을 사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가 그 마음을 숭고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모두가 그런 삶을 동경하게 만들고, 나아가 누군가에게 그런 희생을 기대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람은 입체적인 존재다. 누군가의 영웅이 된다고 해서 모두의 영웅이 될 수는 없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그가 모든 사람의 구원은 될 수 없다. 인간은 각자의 결핍과 욕망과 이상향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누군가를 바라본다. 모두가 같은 영웅을 사랑했다면 애초에 영웅을 대적하는 빌런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희생 그 자체가 아니라 희생한 개인에게 이후 무엇이 따라왔는가에 있다. 이건 명라의 스토리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당연한 말이지만 누군가의 희생으로 세상이 잠시 구원받았다고 해서 개개인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생활을 그대로 이어나가겠지. 처음에는 모두가 감사한다. 기도를 올리고, 이름을 기억하고, 그 희생을 기념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감정은 형식적인 의식이 되고, 의식은 반복되는 습관이 되며, 습관은 결국 진짜 의미는 서서히 잊힌다. 사람들은 다시 불안해지고, 다시 기대고 싶어 하고, 다시 누군가가 자신들을 구원해주기를 바란다. 스스로 구원하는 법을 배우기보다 또 다른 구원자를 찾는다. 잊힌 귀사의 조각상이 그 사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때 그를 향하던 기도는 어느새 누구를 향했지? 그들이 사랑한 것은 희생한 개인이 아니라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름은 바뀌어도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구원자는 계속 교체되고 희생의 자리는 계속 비워진 채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가 불편했다. 좋고 나쁨을 떠나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오빠는 희생을 선택했다기보다 희생의 자리로 등 떠밀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희생은 노골적으로 종용된다. 구원은 숭고한 이름을 하고 있지만 그 안쪽에는 누군가의 삶을 담보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반복된다. 하우주 역시 세상을 구하겠다는 대의로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다. 그가 악귀를 잡는 이유도 결국 나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이 나와 연결되어 있었기에 움직인 것에 가깝다. 만약 그 중심에 내가 없었다면 그는 과연 같은 방식으로 움직였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하우주에게 중요한 것은 추상적인 세계가 아니라 잃어버릴 수 없는 단 하나의 사람이다. 클리셰적인 요소겠지만 대의는 언제나 개인의 사랑을 빌려 말한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이고, 누군가에게는 연인이고,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남은 삶의 이유인 사람을 붙잡아 놓고, 그들을 잃는 일을 세상을 위한 선택이라 부른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그것은 대의가 아니라 상실이고 숭고함이 아니라 강요된 이별이다. 만약 지금의 임천시에도 명라가 하나의 개념으로 남아 있다면 결국 그들 역시 사람들에게 잊힌 것일지도 모른다. 한때는 구원자였고, 한때는 기도의 대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 사람들은 또 다른 이름을 부른다. 더 강한 힘, 더 즉각적인 구원, 더 편리한 희생을 향해 손을 뻗는다. 대의를 위해 개인이 희생되는 이야기는 오래도록 아름다운 서사로 소비되어 왔다. 하지만 《러브앤딥스페이스》는 그 아름다움의 표면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벗겨낸다. 희생은 숭고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숭고함은 폭력이 된다. 당연하지도 않다. 희생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답은 거창하지 않다. 모두가 영웅이 될 필요는 없다. 모두가 세계를 구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누군가를 구원자의 자리로 밀어 넣고 그의 고통을 자신의 안온함과 교환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구원은 한 사람의 몸을 불태워 얻어내는 기적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몫의 책임을 나누어 지는 방식이어야 한다. 누군가 희생을 선택했다 해서 그 선택을 당연하게 여겨선 안 된다. 그 선택을 아름답게 포장해 다음 희생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희생한 사람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것은 그의 이름을 기리는 일이 아니라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누군가를 잃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에 가까워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살아야 할 삶은 영웅을 기다리는 삶이 아니다. 또 다른 구원자를 찾아 기도하는 삶도 아니다. 자신의 불안과 결핍을 타인의 몸 위에 얹지 않는 삶. 누군가의 고통을 세계의 질서로 삼지 않는 삶. 구원받은 뒤에도 변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달라지려 애쓰는 삶. 구원자는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소비되고 영웅은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대체된다. 구원은 스스로 해야 한다. 이는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누구도 나를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뜻이다. 누군가 먼저 불빛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불빛은 타인을 대신하여 불타는 것이 아니라 아직 어둠 속에 선 사람들이 자신의 불을 발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自燈明法燈明 스스로를 진리의 등불로 삼아 그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라. 한 사람의 희생으로 세계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빛을 잃지 않음으로써 함께 어둠을 견디는 일. 구원이란 그런 형태여야 한다. 우리는 정말 영웅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우리 대신 아파줄 사람을 계속 찾고 있을 뿐인가?
한국어
0
2
9
227
꜀(^. .^꜀ )꜆੭ 서봄
나 트친 70명이 넘어가는데 탐라 왜 이래? 거의 무슨 친구 7명 있는 탐라 같은데 무슨 일이죠 다들 열심히 말 좀 해주세요
한국어
1
0
6
187
꜀(^. .^꜀ )꜆੭ 서봄
개인적인 캐해로 만약 하우주 앞에서 다이어트를 한다고 했을 경우 가장 먼저 물어보는 말이 왜? << 일 것 같아요 ㅋㅋㅋ 안 빼도 예뻐 이런 게 아니라 다만 그 이유가 중요한 건데, 건강 증진을 위해서 라고 하면 생각보다 현실적으로 매우 잘 도와줄 것 같아요. 식사나 운동이나 수면이나 전부 다 근데 만약 타인이 비난을 해서 하는 경우라면 총 쏠 듯 ㅋㅋㅋㅋㅋㅋㅋ 아 뭐 진짜 총을 쏘진 않겠지 하우주의 방식대로 저를 잘 달래줄 듯 싶습니다
한국어
0
0
1
95
꜀(^. .^꜀ )꜆੭ 서봄
진짜진짜 개인적인 생각으로 전 사실 소나기의 장도 이후에 수차례 보면서 너무무서워 << 로 귀결된 내용이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국어
0
0
1
17
꜀(^. .^꜀ )꜆੭ 서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우주의 말은... 다정.. 그래 다정하죠 ㅠ 나한테는 다정하지 그것도 전부 진심이지 알지 근데 왜 자꾸 한구석이 서늘하냐,,, 싶을 때가 너무 많아요 제가 하우주를 너무 흑막캐로 보고 있나요? 복흑? 당연히 아닙니다 하지만 들어보세요
한국어
0
0
1
43
꜀(^. .^꜀ )꜆੭ 서봄
하우주 관련해서 무슨 말 하나 더 하려 했는데 기억이 안 남 ㅎ 이래서 오타쿠 망상은 생각날때 메모를 해둬야만 하는데 ㅠ
한국어
0
0
0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