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다
5.7K posts


[한때 흠모했던 당신에게]
우선 이 글의 목적이 한 개인을 단죄한다거나 그의 과거를 부정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자 합니다. 다만, 보다 향상된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한 진보적 20대 더불어민주당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41년 전, 스물여섯의 한 청년이 영등포구치소의 차가운 마룻바닥에서 먹지 석 장을 겹쳐 깔고 안 나오는 볼펜을 눌러가며 항소이유서를 썼습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의 항소가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의 과중함을 호소하는 데 있지 않다"고 못 박았습니다.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인간이 만든 법률이 아니라 양심이라는 척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관련된 사건이 "우리 사회의 어떤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상태의 반영이며 또 미래의 그것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규명"할 의무가 있다고 적었습니다. 나는 그런 당신을 흠모했습니다.
수십년이 지나, 당신이 어용지식인을 자처할 때조차도, 나는 그것을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거악을 향한 한 지식인의 의도된 자기희생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때론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할 때에도 당신의 주장은 어떠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당신께 묻습니다. 당신의 오늘의 말과 행동은, 우리 정치의 어떠한 상태의 반영이며, 미래의 그것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까.
며칠 전, 당신이 던진 핵심 비유는 '재건축'이었습니다. 대중이 원한 것은 증축인데 이재명은 재건축을 하려 했고, 그러기 위해 철거 용역과 촉법 평론가를 동원해 기존 입주자를 허물고 있다는 것. 당신은 이 사태를 자가면역질환이라 명명했습니다. 면역세포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자기 정상 세포를 공격하는 병이라고요.
비유는 논증보다 정직합니다. 화자가 세계를 어떻게 분절하고 있는지를 논리적 방어막이 작동하기 전에 누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결론을 반박하지 않습니다. 각각의 비유 안에 당신의 인식론적 전제가 화석처럼 박혀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정당, 진영을 '건축'에 비유했습니다. 증축이냐 재건축이냐와 같은 비유의 가장 깊은 문제는 그것이 정치를 완성태를 가진 사물로 환원하는 데에 있습니다.
건물은 설계도라는 완성태를 통해 그 도면을 물질로 옮기는 시공을 통해 완성됩니다. 건물에는 완성이 있습니다. 정해진 층수가 있고, 입주자 명부가 있고, 입주 동의서도 있을 텝니다. 당신의 비유에 따르면, 민주개혁진영이라는 건물은 이미 골조가 완성되었고, 입주자가 있으며, 건물의 구조를 변경하려면 그들의 동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 공동체는 건물로 볼 수 없습니다. 차라리 한나 아렌트가 말한 "행위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정치적 행위의 본질은 탄생성, 곧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이 끊임없이 시작되는 데 있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을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존재 이유입니다. 공적 영역을 '건축', '제작'의 원리로, 즉 설계도대로 결과물을 찍어내는 논리로 다루려는 시도야말로 되려 전체주의로 미끄러지는 첫 단추입니다. 제작에는 반드시 재료의 폭력이 선행됩니다. 도면에 맞지 않는 자재는 깎이거나 버려지니까요.
이재명 대통령이 '철거의 폭력'을 행사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건축의 은유부터가 폭력적입니다. 정치를 건물로 보는 순간 입주자와 비입주자, 동의 자격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갈립니다. 새로 유입된 '뉴이재명' 지지층을 "동의해줄 권리를 박탈당한 외부인"으로 분류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건축이라는 은유의 문법이 강제하는 귀결입니다. 당신께서 이재명의 철거를 비판하는 바로 그 언어가, 새로 온 자들을 '도면에 없는 자재'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폭력의 피해를 고발하면서, 폭력의 문법을 구사하는 당신의 언어를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또 '자가면역질환'에 비유했습니다. 면역세포가 외부 침입자가 아니라 자기 정상 세포를 공격하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코어 지지층을 '정상 세포', 새로운 평론가들을 '자신을 공격하는 오작동한 면역체계'로 비유했습니다.
면역의 언어는 20세기 내내 가장 강력한 정치적 무기였습니다. 사회를 신체로 보고 특정 집단을 바이러스, 암세포, 오염으로 규정하는 수사는 언제나 배제와 숙청의 전 단계였습니다.
면역학적 은유의 본질은 Self와 Non-self의 절대적 구분입니다. 면역계가 하는 유일한 일은 "이것은 나인가 아닌가"를 판별하고, 아니라고 판정된 것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당신께서 진영을 면역계로 사유하는 순간, 정치는 '식별과 제거'의 문법으로 환원됩니다. 누가 진짜 우리의 세포이고, 누가 외부에서 침투한 이물질입니까. 당신께서 이재명 대통령을 향해 "면역질환을 앓고 있다"고 진단하지만, 실상 그 진단 행위가 면역학적임을 당신은 정녕 모르셨습니까. 당신께선 과연 정상 세포의 명부를 쥔 자로서, 무엇이 self이고 non-self인지를 판정하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건강한 정치체는 이물질을 제거하며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여 자기를 갱신함으로써만 살아갑니다. 면역의 논리에는 성장이 없습니다. 오로지 방어와 제거, 경계 순찰만이 있습니다. 그런 정치, 그런 민주당을 원하십니까?
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고 했습니다. 이 명제는 대개 우파 결단주의의 표현이지만, 당신은 이를 민주진영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에서 적과 동지를 재분류하는 권한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권한은 그 누구도 쥐어주지 않았습니다. 종교전쟁에서 이교도가 아니라 이단자에게 가장 잔혹했던 것처럼, 당신 또한 어쩌면 가장 격렬한 적대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당신이 지적하는 '촉법 평론가'에게 있지는 않은지, 되묻고 싶습니다.
가장 노골적인 당신의 비유는 '촉법 평론가'입니다. 형사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미성년과 같다는 의미겠지요. "평론가에게 물어야 할 지적 책임성을 적용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며, 청와대 선물을 언박싱하는 행위를 "천하고 상스럽다"고 했습니다.
연령의 위계이자 계급의 위계입니다. 그리고 진보의 언어를 입은 능력주의적 위계 판정입니다. 당신은 비판자에게 '지적 책임성'이라는 시험을 부과하고, 통과하지 못한 자를 '촉법'으로 강등했습니다. 진보가 그토록 비판해온 서열의 메리토크라시적 문법이 아닙니까? 누가 발언할 자격이 있는가를 '지적 수준'으로 판정하는 순간, 공론장은 자격시험장이 되며, 당신이 그토록 배격한 엘리트주의적 통치가 실현됩니다.
랑시에르가 말했듯, 민주주의의 핵심은 '몫 없는 자들의 몫'이 아닙니까. 정치는 셈해지지 않던 자들이 "우리도 말할 자격이 있다"고 선언하며 기존의 질서를 깨트릴 때 발생합니다. 누구도 타인을 지적으로 미숙하다고 판정하며 발언권을 박탈할 정당한 근거를 갖지 못합니다. 그런 판정 행위 자치가 불평등을 전제하고 재생산하는 폭력, 랑시에르가 말한 "우민화" 아닙니까.
당신의 비유는 감각의 분할을 다시 긋고, 새로 들어온 목소리들을 '자격이 부재한 미성년'의 자리로 되돌려보내며, 누가 어디에 속하고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재배치하는 질서 유지 작업이자 치안의 작동입니다.
당신은 진보 자신의 '연속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역사를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의 매끄러운 축적으로 바라십니까? 이 연속성의 신화야말로 에너지를 잠재우는 마취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진정한 역사적 순간이란 연속성이 폭파되고, 억압된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는 때라고 생각하진 않으셨습니까? 그것이 당신을 26살의 학생운동가로, 50대의 어용지식인으로 만든 것 아니었습니까?
41년 전 구치소 바닥에서 항소이유서를 쓰던 청년은 기존 질서의 연속성을 폭파하려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당신은 연속성의 수호자가 됐습니다. 골조의 영속을 명령하고, 당신이 부쉈던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부수지 말라고 말합니다.
나는 당신의 시간은 정지되었다고 판단합니다. 능동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협하는 새로움에 대한 반작용으로만 자신을 규정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뉴이재명'이든, 어떤 이들이든 새로운 정치구조에 대한 당신의 격렬한 반응은 새로운 가치의 제안이 아닌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합니다. 당신의 비유들은 "저들은 악하고 우리는 선하다"는 부정을 통한 자기 긍정의 회로입니다. '촉법', '용역', '상스러움'이라는 부정의 언어로 상대를 규정하고, 그 부정을 통해 당신 주장의 정당성을 도출하는 구조가 그렇습니다.
당신은 한 때 '어용지식인'을 자처했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나서서 비난을 감수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우리 편에게는 비판보다 방어가 더 시급하다는 인식이었겠지요. 적대 세력의 공세 앞에서 내부의 비판은 이적행위가 될 수 있으니, 기꺼이 방패가 되겠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재명 시대가 도래한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있습니까? 어제까지 어용을 정당화하던 논리대로라면, 이재명 대통령을 향한 지금 당신의 공세야말로 당신이 비판했던 "비판을 위한 비판"이 되지 않습니까?
당신은 "나는 여전히 이재명의 지지자"라고 합니다. 어용지식인의 진짜 전제는 '특정 인적 네트워크에 대한 충성'이었음이 드러난 것 아닙니까. 당신이 지키려던 것은 '민주정부'라는 추상이 아니라, 자신이 그 중심에 있었던 구체적 부족(部族)이 아닙니까. 그렇기에, 당신은 이재명을 통해 새로이 등장하는 새로운 주류의 형성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 아닙니까.
당신의 지지가 주류의 교체 직후 격렬한 공세로 전환되었다면, 그 지지라는 단어가 실제로 가리켰던 것은 진영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당신이 정의하는 노선에 대한 복종이 아닙니까. "나는 지지자다"라는 문장은, 최소한 제겐 "당신은 내 노선을 따라야 한다"고 번역해서 들립니다.
당신께서 26살의 청년 시절 쓴 항소이유서,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당신께선 네크라소프의 시구를 인용하셨지요.
슬픔과 노여움은 분리될 수 없는 한 쌍입니다. 슬픔은 노여움에 방향과 깊이를 선사합니다. 무엇을 잃었는지 아는 자만이, 무엇을 향해 분노해야 하는 지도 알지요.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그렸듯, 이반의 반역에는 고통받는 아이들을 향한 깊은 슬픔이 깔려있었기에 그것은 신을 향한 정직한 항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멀리 있는 추상적 인류는 누구나 사랑할 수 있지만, 진짜 사랑은 눈 앞의 구체적 인간을 견디는 데서만 시작됩니다. 이 구별이 무너질 때, 즉 추상적 대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눈 앞의 인간을 억압하기 시작할 때, 사랑없는 정의는 인류 전체의 행복을 명분으로 그리스도마저 가두는 대심문관의 논리로 미끄러집니다.
오늘 당신의 언어에는 노여움은 넘치되 슬픔이 메말랐습니다. 당신의 분노는 잃어버린 가치를 향한 애도가 아니라, 빼앗긴 자리에 대한 항의로 들립니다. 당신의 언어에는 상대를 향한 슬픔도, 같은 진영이 된 자들을 잃는 데에 대한 어떠한 애통도 없습니다. 오직 분류하고, 강등하고, 제거하려는 냉정한 식별만이 있을 뿐입니다.
41년 전 당신은 자신을 "폭력 과격 학생의 본보기"로 만든 권력의 낙인술을 고발했습니다. 낙인은 한 인간을 표본으로 삼아 그의 복잡성을 단일한 기호로 짓이기는 폭력입니다. 그 낙인의 피해자임을 호소했던 당신이, 이제 촉법이라는 낙인을 발명해 후배들의, 청년들의 이마에 찍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글은 한때 당신을 흠모했던 자의 가장 정직한 헌사입니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 당신의 항소이유서로 돌아오길 바랍니다. 슬픔과 노여움이 한 몸이었던 자리로, 낙인의 피해자가 낙인의 시술자가 되기 전 그 자리로. 부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긍정을 통해 자기를 세우고, 단절을 두려워하지 않던 그 자리로 말입니다.
발터 벤야민은 역사의 천사가 폐허를 등지고 미래로 떠밀려 간다고 했습니다. 천사는 과거의 잔해를 보며 그것을 일으켜 세우고 싶어하지만, 진보라는 폭풍이 그를 미래로 밀어냅니다. 당신은 지금 폐허를 일으켜 세우려 몸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등진 그 곳, 바로 미래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무언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당신께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천사가 될 것입니까, 아니면 폐허의 관리인이 될 것입니까.
한국어
사이다 retweetledi
사이다 retweetledi

유시민 작가의 어제 방송은 보지 않아서 상세한 평가는 어렵지만 이재명 대통령에게 훈수를 두었다고 하니
지난 대선 직전 유시민 작가의 김문수 아내 설난영에 대한 (여성과 학력을 차별하는) 부적절한 발언 때문에 논란과 비판이 생기고
전국 모든 지역에 “고졸 우리 엄마” 운운하는 플랑이 붙고
제가 몇몇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를 “민주당 사람도 아니고”라며 대응하기 위해 고생했던 일이 떠오르네요.
정말 부적절한 발언이었고 몹시 화가 났지만 정치비평을 더 안하신다고 해서 언급은 더 안했는데
승리해서 다행이지만 당시 선거에 분명히 부정적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공과 과가 다 있는 분이고 좋은 역할을 하신 일도 있지만
정치비평을 다시 하시기 전에
말과 행동으로 남을 힘들게 하고 진보진영을 어렵게 만들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본인부터 철저히 반성을 하고 사과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왜 정치비평을 그만두셨는지 그 이유도 다시 생각해 보셨으면.
한국어
사이다 retweetledi
사이다 retweetledi

@yooseongmin2022 대구시장 추경호가 테슬라 공장 유치한다고 했으니 믿고 기다려보세요~^^ 참! 달성군 의원 이진숙도 빵도체 공장 유치에 더 열심히 하라고 전해주시고요.
한국어

경북 구미가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평당 148만원인 땅을 단돈 1000원에 내놓겠다고 합니다.
지금 소멸 위기에 처한 지방이 얼마나 절박한지, 필사적인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29일 이재명 대통령은 재벌총수들을 불러모아 '호남 반도체 투자'를 발표한다고 합니다.
삼성과 SK 회장은 이미 대통령과 개별 면담까지 했고 청와대 정책실장은 김어준 유튜브에 나와 "숫자들이 매우 낯설 것"이라고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권의 어느 누구도 "왜 호남인가?"에 대해 단 한마디 설명도 없습니다.
우리 경제의 역사에서 국가권력이 민간기업에게 폭력적인 강압을 행사한 흑역사가 몇번 있었습니다.
1998년 12월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게 넘긴 '반도체 빅딜'이 그 사례입니다.
정치권력이 은행을 앞세워 강압으로 반도체를 빼앗으니 LG는 저항 한번 못하고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고 이 빅딜은 두고두고 'LG의 恨'으로 남았습니다.
이 빅딜이 없었다면 SK하이닉스는 지금도 LG반도체일 겁니다.
빅딜 직후 대우그룹은 공중분해되었습니다.
정치권력이 민간기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권력의 명령대로 여기를 자르고 저기에 갖다붙였던 빅딜은 독과점을 심화시키고 산업을 망칠 게 뻔했습니다.
당시 IMF위기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 대책을 연구하던 저는 빅딜정책을 비판하다 KDI를 떠나야 했습니다.
빅딜정책의 잘못은 IMF위기의 태풍에 덮혀 역사에 파묻혀버렸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28년이 흐른 지금 또 반도체를 두고 국가권력이 폭력적 강압을 시전합니다.
'제2의 반도체 빅딜'입니다.
이번에는 호남을 콕 집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둘 다 무조건 호남에만 대규모 투자를 하라'는 겁니다.
두 회사가 자율적인 경영판단으로 호남을 선택했다고 우기기에는 호남의 반도체 입지여건이 매우 열악합니다.
불과 보름 전에 "반도체공장이 무조건 한국은 아니다. 전력 땅 사람 물이 다 갖춰져야 한다"고 말했던 SK 회장이 자율적으로 호남을 선택했다? 이걸 믿으라는 겁니까.
전력-용수-인력-부지-소부장 등 반도체 입지의 5대 요소를 두고 대구경북, 부산경남, 광주전남, 대전충남 등 지방광역권의 입지경쟁력을 채점한다고 생각해보면 됩니다.
이재명 정부가 그런 채점표를 갖고 있다면 즉각 공개하고 검증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채점표가 존재할 리가 없습니다.
'닥치고 무조건 호남'이기 때문입니다.
원전과 방폐장은 영남에 집중되어 있는데 반도체는 왜 호남인지 과연 영남이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왜 호남인가?"
"왜 영남은, 충청은 아닌가?"
이 문제는 앞으로 두고두고 큰 화를 부를 것입니다.
모든 지방이 간절하게 유치하고 싶은 삼전닉스의 반도체 공장이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 근거도, 공정한 유치경쟁도 없이 호남으로 간다면 정치경제적 후폭풍은 감당하기 어려울 겁니다.
당장 삼전닉스의 경쟁력, 우리 반도체산업의 경쟁력에 문제가 발생하고 이는 기업가치와 주가에 악영향을 줄 것입니다.
한국 반도체산업은 정치가 투자 입지까지 결정하는 것을 본 글로벌투자자들이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지역균형발전이 아니라 '호남에만 무조건 올인하는 불균형발전'이라는 비판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서 정권 스스로 지역간 첨예한 갈등을 자초하고 정권의 몰락을 재촉할 것입니다.
고작 5년 짜리 정권의 납득할 수 없는 정책은 정권이 바뀌고 국회권력이 바뀔 때마다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호남 반도체 계획'을 백지화해야 합니다.
대신 각 지방이 반도체 유치를 위한 공정한 경쟁을 시작하도록 정부는 경쟁의 룰을 정하고 지원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정부는 지역균형발전의 취지에 맞게 지방의 반도체산업 유치를 돕기 위한 인프라 지원대책을 먼저 제시하고, 각 지역은 구미가 평당 1000원에 땅을 내놓았듯이 전력 용수 인력 부지 소부장 등에 관한 자신들의 유치조건을 갖고 경쟁해야 합니다.
그리고 최종 선택은 삼전과 닉스가 하면 됩니다.
정부는 선을 넘지 말아야 합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정부를 이기는 시장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으로 이미 부동산정책에 실패했고, 이제는 반도체 산업정책에서 더 심각한 실패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반도체 특수에 가려 있지만 고환율 고물가 고금리 전월세 가계부채 청년실업 자영업자 등 민생경제의 어려움은 심각합니다.
레버리지 빚투로 주식시장도 건전하지 못합니다.
민생과 경제가 실패하면 정권에 어떤 심판이 기다리는지 대통령과 정부는 도대체 위기의식을 없는 것 같습니다.
당장 호남 반도체 투자부터 백지화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한국어
사이다 retweetledi

허지웅의 유시민에 대한 일갈
마지막 문단 뜨거워지네요.
(내가 쓰고 싶었던 모든 생각과 느낌이 다 담겼네)
두고 두고 읽어도 좋다.
(20년 전에 사석에서 한번 본적 있는데. 여전하다)
이경하@igyeong51134506
허지웅 sns...
한국어

@right_mind_2 20대 극우화를 막겠다고 매불쇼 나와서 말하고 도와달라던 청년이 미디어 몇번 맛보고 나더니 같은 진영 공격하는데 컨텐츠가 집중되기 시작하고, 진영 분열의 최전선에서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최전선에 서 있네. 청년들이 지금 당신이 청와대에서 받은 선물사자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비웃겠지.
한국어

@right_mind_2 제대로 공부하고 제대로 떠드세요.앉아서 자판만 치고 있으면거 그런 정성은 들여야지. 유시민의 글쓰기책도 추천합니다. 글쓰는 공부도 하세요. 2030이 뭐 대단한 벼슬인줄 아나요. 우리도 그시기를 거쳤고 돌아보면 아는것조금갖고 혈기로 꽥꽥대던, 그래서 돌아보면 이불킥하고싶은 시간들입니다.
한국어
사이다 retweetledi

@leon_jk_lee 방송에서 한 내용이랑 정정하는 글의 내용이 전혀 다르잖아!! 무슨 불필요한 오해가 발생한다는건지…. 불순한 의도로 방송한거겠지!!!
한국어
사이다 retweetled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