鏡花水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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離別
알고 지낸 지 6년, 첫 연애는 2개월, 두 번째 연애는 3년. 그는 나의 친구요, 아버지요, 연인이며 구원이자 집이었습니다. 그 세월이 절대 짧은 세월이 아님을 나는 압니다.
나의 첫사랑인 그대를 위해, 이기적인 나를 위해 이별을 고했습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불완전한 미래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관계를 이어가는 건 의미 없는 짓이라는 것을 압니다. 눈물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알고 지낸 세월이 6년인데 그대의 눈물을 오늘 처음 봤습니다. 나 역시 그대를 몰랐습니다. 내가 오만했습니다, 그대의 눈물은 아팠습니다. 그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걸 보니 손이 떨렸습니다. 내 눈가도 붉어졌습니다.
나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한 그대를 위해 나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이기적인 나라서 미안합니다.
이런 나를 사랑하며 그대는 힘들지 않았다고, 행복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토록 그대만큼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겁니다. 그대가 준 사랑은 과분하도록 따스했고, 불안할 정도로 조건이 없었습니다. 마지막까지 그대는 나를 위했습니다.
고생했습니다.
그대는 부족한 나에게 사랑하는 법을, 사랑받는 법을, 가족이란 것을, 행복이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무너진 나를 일으켜 세운 것도, 지독한 불안에서, 극심한 불면에서 나를 꺼내준 것도 그대였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아직 마지막이라는 게 실감 나지 않습니다. 6년을 함께한 그대가, 내 인생의 3분의 1을 함께한 그대가, 언제나 나를 위했던 그대가, 나의 구원이었던 그대가 없어졌다는 건 그림자가 없어진 기분입니다.
이제는 그대의 눈을, 그대의 손을, 그대의 팔을, 그대의 몸을, 그대의 머리를, 그대의 입술을, 그대의 얼굴을, 그대를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이기적인 나이기에 마지막까지 이기적인 부탁을 하겠습니다.
그대가 원하던 것을 이루고,
그대가 사랑하는 것을 곁에 두고,
그대가 그대 삶의 주체가 되어 행복하게 살아가세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반드시 행복해지세요.
내가 없는 미래에서.
그대를 사랑했습니다. 꼭 나의 이름을 잊고 살아가세요.
2026_05_13_
친애했던 그대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합니다.
한국어


취향에 관하여.
趣向: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
뜻/달릴 취, 향할 향. 어떠한 뜻을 향하여 달림을 이르는 말.
오늘 나는 취향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성향을 제외하면 나는 내 취향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성향 이야기를 같이한다면 설명해야 할 말이 너무도 많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 특정 성향과 단어가 넘쳐나겠지만, 나에 대해 알아가기 위해, 어떠한 성향 혹은 취향을 특정된 단어로 표현하기를 삼가고, 풀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다양한 내 취향에 관하여 서술해보자면,
나는 동물을 좋아한다. 대체로 포유류를 좋아하고, 고양잇과, 갯과 동물을 가장 좋아한다.
무채색보단 눈이 편안한 쨍하지 않은 파스텔톤의 분홍색과 보라색, 민트색, 초록색, 파란색 등을 좋아한다.
팝송보단 제이팝을 즐겨 듣고, 한국 노래는 한국어 가사의 비중이 높은 곡을 좋아한다. 노래를 들을 때는 노래의 소리보다 가사와 가수의 목소리, 전달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독서를 좋아한다, 비문학보단 현대문학 소설을 좋아하며, 워딩이 자극적이고, 생각이 많아지며 쉽게 읽히는 책을 선호한다. 대표적으로 ‘채식주의자-한강‘, ’지구별 인간-무라타 사야카‘, ’구의 증명-최진영‘ 등이 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관심 있는 분야를 공부하고, 이해하고, 정립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보통은 나에 관한 글이나 성향 고찰글을 주로 작성한다.
시끄러운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친한 사람이 많거나 관심사가 나온다면 내가 제일 시끄럽긴 하다.) 조용한 카페나 서점, 공원 등에서 햇볕을 쬐거나 책을 읽으며 노래 듣는 것을 좋아한다.
나를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 다양한 스타일로 매일 다른 사람처럼 바뀌는 나를 보는 것이 즐겁다. 그 중,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은 모리걸과 갸루, 핀터룩 스타일을 가장 선호한다.
나는 내 취향들이 보편적이고 평범하다고 생각한다. 설명을 해야 할 정도로 매니악한 취향들은 아니니까. 이젠 성적 취향도 적어볼까 한다.
특정 성향에 대한 언급을 자제한다고 했으니 설명해보자면 나는 제압당하는 것과 순종적인 상대를 괴롭히는 것을 좋아한다.
상대가 순종하는 것을 선호하긴 하나, 순종한 상대가 만약 반항하게 된다고 해도 내가 강압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상대를 선호한다. 그렇기에 내가 상대를 괴롭힐 때면 상대가 여성인 것을 선호한다.
상대에게 수치심을 주며 상대가 괴로워하는 표정을 보거나, 상대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시키며 상대가 모욕감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며 즐긴다. 내가 하는 말, 행동, 분위기 등으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을 좋아하며, 그 과정에서 쾌감을 느낀다.
상대의 몸에서 나로 인하여 피가 나오는 것을 좋아한다. 흘러나오는 피가 아름답다고 느끼며, 상대의 피를 핥고, 만지며 성적 만족감을 느낀다. 허나, 상대를 때리는 것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칼에 베인 흉터나 고통스러워하는 상대를 보는 것은 좋으나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상대를 내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나의 손길로, 나의 말로, 나의 의도대로 움직여진 상대를 보면 아름답다고 느끼며, 아름답게 만든 상대를 나의 손으로 망가뜨리는 것을 좋아한다.
상대에게 반항하고 제압당하는 것을 즐긴다. 상대를 물고, 때리고, 할퀴며 반항하고 그런 나를 폭력이 아닌 분위기와 말, 손(크게 힘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내가 제압당하는 것. 속된 말로 힘찍누.) 등으로 제압당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내가 제압당할 때면 비교적 나를 제압하기 쉬운 남성과 접촉하는 것을 선호한다.
상대에게 수치스러운 말과 분위기로 압도당하는 것을 즐긴다.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말에서 일상생활과 그 상황에서 오는 괴리감에 성적 만족감을 얻으며, 나를 쳐다보는 눈빛과 평온한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것을 즐긴다. 상대로 인하여 무너지는 것을 좋아하지만, 내 존엄성이 망가지는 것은 싫어한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는 등의 행위를 행하는 것은 싫어한다.
나를 반려동물 또는 어린아이처럼 대해주는 것, 혹은 나를 모셔주는 것을 좋아한다. 나를 제압할 수 있더라도 어린아이 놀아주듯 나의 말을 따르고,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 과정에서 목줄, 공갈 젖꼭지, 꼬리, 드레스 등 상대가 나를 대하는 것에 따른 소품을 착용하여 상황극 하듯 그에 몰입하는 것을 좋아한다.
성적 취향을 이렇게 적고, 내 취향에 관한 이 글을 작성한 이유는 나에 대해, 내가 원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좋아하는 것과 선호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고 정리하여 내 성향에 대해 알아가기 위해서다.
최근 글에서 내 성향을 잘 모르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다시 내 성향이 뭔지, 특히 성향의 이름에 맞추는 것이 아닌 정말 내가 원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에 대해 구분하기 위하여 이 글을 작성한다.
이 글은 다음 업로드 될 ’성향에 관하여’ 라는 글의 에필로그로 이해하면 되겠다.
한국어


관계의 관하여.
關係: 둘 이상의 사람, 사물, 현상 따위가 서로 관련을 맺거나 관련이 있음. 또는 그런 관련.
빗장 관의 이을 계. 빗장을 맞대어 이어놓은 것처럼 어떤 것과 연결되어있음을 이르는 말.
오늘 나는 인간관계에 관하여 얘기해보려 한다.
이 곳, 트위터는 서로의 진실된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제대로 알 수가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서로를 진심을 다해 대하고 상처받고 사랑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하며 모두가 그럴 것이라고 감히 예상한다. 나 역시 사람을 혐오하며 사랑하니까.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얼굴을, 이름을, 나이를, 성별을 알고 서로와 함께 지내는 것조차 힘든 세상 속에서 서로를 알 수 없는 곳에서 서로와 함께 지내는 것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모이고 뭉치며 사랑하고 혐오한다. 오히려 서로를 아는 곳보다 더 빠져들기도 한다. 서로를 알지 못한 상태로 빠져드니 받는 상처도 점점 커지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트위터를, 아니 SNS를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진심 찾지 마라.’ 는 말을 말이다. 나도 항상 들어왔던 단어니까. 언제나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진심으로 빠져들기 마련이었다. 왜일까, 왜 항상 사랑하고 혐오하고 상처받게 되는 것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인간관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관계가 물과 같이 유연하고,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아쉬운 현실이다. 평생 다른 인생을 살아온 타인과 어떻게 언제나 맞을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에 가까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랑을 위해 자신을 맞춰간다. 사랑하니까.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사랑으로 맞춰가고 양보할 수 있는 정도에 관하여. 지금부터는 관계 위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나의 사랑 이야기다.
나에겐 얼마 전 2주년이 지난 연인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트위터에서 알게 된, 알게 된 지는 올해로 5년에서 6년이 되어가는 연인이 말이다. 아직은 짧은 내 인생의 3분의 1을 함께한지라 서로가 일상에, 인생에 너무 깊게 관련되어있다.
나의 연인은 내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나에게 해주는 것이냐’ 물을 때마다 같은 대답을 한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만큼 양보하는 거고, 사랑하는 만큼 해줄 수 있는 거’ 라고. 그 말에 항상 공감했다. 지금도 공감한다. 사랑이라는 게 참으로 웃긴 점이 차가운 사람은 따뜻하게 만들고, 능숙한 사람은 어리숙하게 만들며, 있던 불만도 없애버린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만큼 맞출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연인의 전부를 알고 있다고 확신했고, 그건 나의 연인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연인은 하나부터 열까지, 십중팔구 맞는 게 없다. 하나도 같은 게 없다는 것이다. 성격과 가치관, 성향, 취향까지 닮은 점이 없다. 그건 모두 알고 있던 사실이다. 서로 그 부분을 알고서 만났다. 그럼에도 사랑하기 때문에. 근래에 들어 그 때문에 관계가 위태롭다는 것을 느꼈다.
나와 연인은 둘 다 지향하는 삶의 방식과 미래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시작했고,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서로에 대해 안다고 자만해 서로를 몰랐다. 너무도 몰랐다.
웃긴 말이지만 우리는 미래를 계획하고 만났다. 아직 어린 나이고, 불확실한 미래이지만 나와 연인은 나이차가 꽤 있고, 삶을 계획해서 살아가는 편이었기 때문에. 사람일은 모르는 것이라 했던가, 서로가 지향했던 미래가 너무 달랐고 이젠 미래를 위해 실행 해야할 때가 다가와 결정을 해야했다, 그래서 최근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왔는데,
이별은 곧 죽어도 입에 올리지 않던 우리가 이별을 이야기 하게 되었다.
아직 이별하고 싶지도, 서로가 없는 삶을 살아갈 수도 없는데. 우리는 마음속에 이별이란 새로운 선택지를 올려두고 고민하게 되었다. 아무도 입으로 꺼내지 않았으나 모두가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이별을 유예시키는 것이라고. 생명 연장이라고.
나는, 아니 우리는 아직 이별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지 않았다. 서로가 없는 삶은 생각하고 싶지도, 그려지지도 않는다. 함께한 세월이 있는데,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누가 받아드릴 수 있겠나. 아직도 맞추려고 하고 있고, 맞춰가고 있다. 근데, 그게 맞춰지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서로가 그리는, 서로가 생각한 미래가 너무 다르다. 가치관이, 삶의 방식이 너무 달라 서로가 서로에게 맞추면 자신이 사라지는 꼴이 된다. 우리는 서로의 행복을 기원하고, 서로가 원하는 삶을 존중하고, 함께하는 미래를 원한다. 참으로 모순적이게도 서로가 원하고 서로가 행복하려면 각자의 미래를 그려야 한다.
모두가 알고 있다, 서로를 위해 이별하는 것이 최적의 선택지라는 것을. 나도, 나의 그대도 서로가 아니었다면 이리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서로가 아니었다면 이별하는 것이 행복한 선택이었을 테니까. 근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이 가지 않는다.
정말 이별이 최적의 선택일까, 과연 나는 그대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대는 어떤 기분일까, 나와 같을까. 이별을 미뤄본 적도, 후회해본 적도 없다, 이런 이별은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 배운 적도 없다.
사람 하나 없어진다고 왜 이리 힘든 것 일까.
관계의 관한 글을 쓰고 있지만 나는 인간관계에 대해서 잘 모른다. 사랑도, 우정도 잘 모른다. 그럼에도 한 번 적어본다. 적다보면 답이 나올 것 같아서 한번 적어본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의 관계는 마침표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느끼고 싶지 않아도 느껴지고,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떠오른다. 이별이란 선택지를 지워봐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여전히 사랑한다, 여전히 미워하고, 여전히 편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끝내야 하는 것일까. 선택을 미루고 고민만 계속된다. 정답은 알 수 없고, 선택은 더욱 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관계 역시 불완전하기에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미 완성된 관계가 아닐까.
이 글을 적는 이유는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고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무 큰 관심을 주진 않았으면 한다. 그냥 평범한 사랑 이야기가 마지막으로 향하는 과정이라고 봐주길 바란다.
한국어


고찰에 관하여.
考察: 어떤 주제나 연구 결과를 깊이 있게 생각하고 연구하여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과정
생각할 고, 살필 찰. 우리는 브드즘에서 안전한 쾌락을 즐기고, 자신의 안전과 쾌락을 위하여 고찰한다. 쉬는 동안 꾸준히 생각했다. ' 지금까지 내가 나를 위해서 고찰을 한 것이 맞을까? ' '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보편적인 성향에 대한 정보를 나에게 입력하는 과정을 고찰이라고 한 것 아닐까? ' 라는 생각을 말이다. 내 생각의 결론은 ‘내가 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 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제야 나를 위한 고찰을 해보려고 한다.
고찰이란 무엇인가, 계속해서 생각하고 의문이 생기는 질문이다. 어떤 주제나 연구 결과를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논리적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이 고찰이란 것은 왜 브드즘에서 필요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모두가 알고 있다. 안전한 브드즘을 위해서. 그렇다면 왜 쾌락을 추구하는 브드즘에서 안전이 필요할까. 브드즘을 즐기는 참여자(에세머, 플레이어, 취향자 등이 있다.)들의 지속 가능한 행복과 쾌락을 위해서 안전한 브드즘을 추구해야한다.
위의 글을 읽다 보면 누군가 의구심이 들 것이다. 자신에게 있어 브드즘은 쾌락 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정체성 혹은 그 이상이기에 그저 쾌락으로만 치우쳐져 생각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말이다. 나 역시 그랬다, 나에게 브드즘은 그저 성적 쾌락 그 이상의 의미이기에 이렇게만 생각해서는 끝도 없는 의문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분명 브드즘은 성적 취향이고, 쾌락을 위한 행위이며 일탈이기에 항상 고민이었다. 그에 관한 고민을 오랫동안 하다가 정리되어 정립한 개념이 스팩트럼이었다.
작년. 고찰 스터디 – 윤슬의 첫 번째 주제였던 에세머, 플레이어, 성향자, 취향자 그리고 바닐라의 스팩트럼에 관한 고찰은 내가 가장 처음으로 브드즘에 관하여 정립한 것이었다. 그것이 누군가에 또 다른 기준이 될 수 있다 생각했기에 깊이 고민하고 도덕적, 윤리적, 언어적으로 뜻과 단어, 그리고 범위가 가장 정답에 가깝도록 정립했다. 그에 대한 글은 아래 타래로 걸어두겠다.
스팩트럼을 통하여 내가 이해할 수 있던 개념은 에세머라고 우리가 칭하는 것은 대체로 브드즘을 통해 혹은 브드즘이 감정, 가치관,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며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이해하여 의문을 해소했다. 모두가 브드즘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정도가 다르며 누구도 그것에 대하여 왈가왈부 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으며, 에세머가 옳은 것도 플레이어가 옳은 것도 바닐라가 옳은 것도 아닌 그저 살아가는, 받아들이는 방식의 차이로 이해했다.
이를 정립했더니 또 다른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브드즘으로써 뭘 얻고 싶은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이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이미 답을 알고있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브드즘을 통하여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관계와 사랑, 쾌락을 원한다.
이 답에 대한 또 하나의 의문은 ' 내가 과연 에세머일까? ' 였다. 내가 정립했던 에세머라는 것은 성향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기는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관계와 사랑, 쾌락을 원한다면 내가 에세머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쉬어가기 전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 전까지 올렸던 글은 그저 내 생각을 AI와 함께 고민하여 만들어낸 자료였을 뿐이라는 것을 나는 피드에 올라왔던(인용했던) 진정한 고찰에 관한 글을 보기 전까지 알지도,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제야 내가 이해한 것은 난 지금까지 한 성향을 잡아두고 그 틀에 나를 끼워맞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과 비슷하고, 알맞은 성향을 찾아 그 성향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고, AI에게 입혀 내가 생각하는 것과 AI가 말하는 것을 일치시키고, 그에 대한 것을 글로 받고 다듬어서 글을 업로드했다. 고찰에 대한 생각을 고치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나는 무엇일까.
나는 프린세스도 에세머도 아니다. 그냥 성향에 관심이 많은 플레이어다. 에세머의 관점에서도, 플레이어의 관점에서도 바라볼 수 있는 생각이 깊은 플레이어 말이다. 물론 이것도 ’나는 확실하게 플레이어다.‘ 라고 할 수는 없다. 여전히 나는 나를 잘 모르고, 성향을 잘 모르며, 브드즘과 플레이에 관하여 잘 모른다. 적었던 경험들이 모두 안전하고 완전한 플레이, 혹은 온전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플레이였기에 경험이 거의 없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냥 나는 관심이 좋았던 것 같다. 브드즘에 대해 공부를 하며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관심있는 주제에 관하여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 공통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에게 관심 있는 질문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며 브드즘에 더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하여 고찰하고 정립하고 머물 것이다. 여전히 나는 브드즘이 좋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좋고, 나에 대해 알아가는 내가 좋다. 그것을 내가 내 정체성이 브드즘과 엮여있다고 생각하여 에세머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어리고, 가치관이 정립된 것도, 정서적 안정을 얻은 것도 아니다. 착각한 것에 대해 자책을 하지도 속상하지도 않다. 이것 또한 나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었을 뿐이니까. 앞으로는 정말 나를 위한 고찰을 하고 글을 써보려고 한다. 한동안은 시험 때문에 자주 찾지 못하겠지만 난 앞으로도 여전히 이곳에 머물 것이니 언제든 찾아주면 좋겠다.
한국어

오랜만에 이야기를 전합니다.
안녕하세요, 경화수월입니다. 한동안 개인적인 사정때문에 활동도 뜸하고, 하더라도 인용 등의 짧은 교류만 했던 점 죄송합니다.
사실 그닥 큰 사정이 있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그저 요새 제가 많이 위태롭습니다. 평소에도 언제나 현생을 신경써왔으나 앞으로 조금 더 현생에 신경쓰기 위해 활동이 뜸해질 것 같아, 전해야 할 소식을 담아보려 합니다.
우선, 현재 2달간 진행되지 않았던 고찰스터디 윤슬과 환상연회는 2027년 겨울에 다시 재개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꾸준히 참여해주시던 분들이 학업에 매진해야될 시기가 되시며 한분, 두분씩 자리를 비우시다 보니 스터디를 유지하기 어려워졌고, 저 또한 꾸준히 운영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져 27년 겨울까지는 꾸준히 운영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스터니와 연회가 재개되기 전(27년 겨울 전)까지는 가끔씩 이벤트 형식으로 가끔씩 찾아뵐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고찰하며 글을 쓰는 방식, 또 고찰을 하는 방식과 의도에 관한 고민은 언제나 뒤를 따랐습니다. AI의 도움을 자주 받기도 했고, 언제나 평균적인 또는 대부분의 알려져있는 정보를 토대로 제 고찰 자체를 자료화 시켜 글을 작성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최근에 올린 인용 게시물의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방식이 정말 나를 위한 고찰일까." 라는 생각이 들어 저를 위한 고찰을 해야겠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저만의 기준을 잡고, 성향관을 잡아나가며, 공부하기 위해 잠시 이 계정은 쉬어가려고 합니다.
쉬어간다고 해서 아예 활동을 중지한다는 뜻은 아니고, 비계로는 꾸준히 활동할 것이며 이 계정에 올라오는 고찰글(하이라이트)을 잠시 쉬어가겠다는 뜻입니다.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지금 제가 꽤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급격하게 안좋아진 건강 상태와 몸이 안좋아지며 불안정해진 정신 상태가 원인이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갑작스럽게 놓인 상황에 정신적으로 지금 많이 위태롭습니다.
그에 따라 지금은 성향 공부를 하는 것보다 저를 위한 공부를 하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해 조금은 저를 보살피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저와 같이 고찰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저는 언제나 이곳에 머무를테니 언제나 찾아와주세요.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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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주제라 인용으로 몇자 끄적여봅니다.
“BDSM은 비도덕적인 행위인가?”
이 질문은 종종 단정적인 답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이 문제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BDSM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방식은 결국 우리가 성과 관계를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성윤리 관점에서는 성행위를 비교적 규범적인 관계 구조 속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고통이나 지배·복종의 요소를 포함하는 BDSM은 일탈적이거나 비도덕적인 행위로 해석되기도 한다. 특히 외부에서 볼 때 일부 행위는 폭력과 유사한 모습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도덕적 거부감이 형성되는 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성윤리 및 성문화 논의에서는 행위의 형태 자체보다 참여자 간의 합의와 자율성을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BDSM 커뮤니티 내부에서도 참여자 간의 명확한 합의와 안전을 중시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관계는 강요나 일방적인 폭력과는 구별되는 특징(SSC, RACK 등)을 가진다. 즉, 외형적으로는 유사하게 보일 수 있는 행위라 하더라도 그 행위가 형성되는 관계적 맥락과 합의의 여부에 따라 윤리적 성격은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BDSM을 단순히 비도덕적 행위로 규정하기보다는, 성적 행위를 평가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특정 행위 자체의 도덕성을 단정하기보다, 성적 관계를 판단하는 윤리적 기준 특히 합의와 개인의 자율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하는가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BDSM의 도덕성을 논의할 때에는 행위의 외형적 모습만을 근거로 판단하기보다는, 그 관계가 어떠한 합의와 책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성적 행위의 윤리성은 단순히 그 형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 간의 자율성과 상호 존중이 얼마나 보장되고 있는가에 의해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BDSM의 도덕성을 둘러싼 논쟁은 특정 성문화의 문제라기보다, 우리가 타인의 성적 선택과 자율성을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사회적 질문일지도 모른다.
이로@doxabandonme
한 번쯤은 같이 생각해 볼 만한 주제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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