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의 바다는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단지 헤어나오기 힘들 정도로 깊은 크레이터일 뿐이고, 콜로니의 바다는 반드시 그 끝이 존재하기에 조수가 존재하는 호수일 뿐이다. 심지어 전자의 명칭은 희석되고 있지. 월면도시인 동시에 수중도시라는 언어유희가 정착되는 일은 없었으니까.
미지의 가능성에 의존하는 대신 그 체계를 인식하는 것만으로 예지는 전파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는 데에 소모해야 할 것이 명확하게 이 눈에 보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실체 없는 위성과도 같은 너를 포착할 수 있었겠지, 라라아, 네가 보는 것들을 나 또한 볼 수 있다는 가정과도 같으니!
만약에, 인간 행위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이론이 정말로 중세기의 지적처럼 오만이 맞았고, 오늘날 포착된 소통의 가능성이 인간 간의 소통이 아니라 소통 간의 소통일 뿐이라면…… 가능성이 개체에게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드나들지 못하는 모종의 체계 그 자체에 있다면……
이후에야 비로소 예지 그 자체가 인간을 움직일만한 힘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 사상가와 행위자 간의 간극은 멈출 줄 모르는 바퀴와도 같기에…… 아우성도 침묵에 먹혀들 뿐인 우주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줄 아는 탁월한 개인으로서의 존재론은 새로운 시대의 생존 전략인 셈이다.
주제철학은 결과적으로 오만이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예지였다. 새로운 시대는 이제 사상가가 아닌 행위자에 의해 시작된다. 활자로 시대를 보는 행위는 별들을 단지 조감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조감도는 행위자의 악의에 의해 개조받기 때문이다. 기계화는 죽음의 한 가지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