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얼거리는 남자@CurbsideCroaker
4월이 되어 내가 좋아하는 굴라면을 라멘집에서 더 이상 팔지 않는다는 사실, 더 정확히 말해 굴라면은 겨울 한정 메뉴이므로 4월에는 팔 수 없다는 라멘집의 설명, 더더 정확히 말해 같은 라멘집에서 굴튀김은 여전히 팔고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굴 자체는 4월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4월에도 조달 가능하고, 4월에도 기름에 튀겨져 손님 앞에 놓이고 있는데, 오직 그 굴이 라멘 위에 올라가는 일만이 4월에는 금지되어 있다는, 이 음식학적 분리주의의 부조리 앞에서, 나는 카운터에 앉아 메뉴판의 굴튀김 사진을 들여다보며, 굴은 같은 굴이고, 그 굴은 같은 바다에서 왔으며, 같은 어부의 그물에 걸려, 같은 트럭에 실려, 같은 주방의 같은 냉장고에 들어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 굴이 라멘 국물 속에 떠 있는 일은 3월 말로 종료되었고, 그 굴이 튀김옷을 입고 접시 위에 놓이는 일은 4월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이 자의적이고 엄격하고 그러나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분류 체계 앞에서, 나는 라멘집이라는 작은 우주가 어떻게 자기만의 사계절을 발명해냈는지를 천천히 깨닫는데, 자연의 사계절은 굴이 4월에도 살아 있다고 말하지만 라멘집의 사계절은 4월의 굴은 라멘이 될 수 없는 굴, 오직 튀김이 될 자격만 남은 굴, 등급이 강등된 굴, 라멘 위에 떠오를 권리를 박탈당한 굴이라고 선언하며, 이 선언은 어떤 식품위생법에도, 어떤 영양학적 근거에도, 어떤 미식적 합리성에도 기반하지 않은 채 오직 겨울 한정이라는 네 글자에 의해서만 정당화되고, 겨울 한정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마법의 주문, 즉 4월의 굴을 라멘에서 추방하는 동시에 4월의 굴을 튀김에서 사면하는 이중의 주문이며, 이 주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묻는 손님은 없고, 묻는 손님은 없을 뿐 아니라 물어서도 안 되며, 왜냐하면 라멘집의 사계절은 자연의 사계절보다 더 신성하고 더 엄격하고 더 침범 불가능한 사계절이기 때문에, 라멘집의 주인은 굴라면을 안 판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굴튀김은 판다고 말하지만 그 두 문장 사이의 모순을 인지하지 않으며, 인지할 필요가 없고, 인지해서도 안 되는데, 모순을 인지하는 자는 더 이상 라멘집의 손님이 아니라 라멘집의 신학을 의심하는 이단자, 굴라면의 부재 속에서 굴튀김의 존재를 보고 마는 자,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본 자가 되어버리고, 본 자의 형벌은 굴라면을 먹지 못하는 일이 아니라, 4월의 라멘집 카운터에 앉아 굴튀김 한 접시를 시켜놓고, 그 굴튀김 속의 굴이 만약 한 달 전에 이 가게에 도착했다면 라멘 위에 떠올랐을 것이고, 그 굴이 한 달 늦게 도착했다는 단지 그 이유 하나로, 단지 달력이라는 인간의 발명품 위에 며칠 늦게 찍힌 도장 하나로, 영원히 라멘이 될 기회를 잃고 튀김이 되어버렸다는, 이 우연의 폭력성을 곱씹으며 식어가는 굴튀김을 입에 넣는 일이며, 굴튀김은 맛있고, 굴튀김은 분명히 맛있지만, 그 맛은 굴라면의 부재를 채워주는 맛이 아니라 굴라면의 부재를 더 명확하게 만드는 맛, 굴이 라멘 위에 떠올랐을 때 가질 수 있었던 그 풍미를, 굴이 튀김옷에 갇혀버린 지금에는 영영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혀끝에서 매번 다시 확인시키는 맛이고, 나는 이 맛을 4월 내내, 그리고 5월 내내, 그리고 다음 겨울이 올 때까지 견뎌야 하는데, 다음 겨울이 와서 굴라면이 다시 메뉴판에 올라온다 해도 그것은 같은 굴라면이 아닐 것이며, 4월에 박탈당한 굴라면의 자리는 어떤 12월의 굴라면으로도 메워질 수 없을 것이고, 왜냐하면 그때의 굴라면은 12월의 굴라면이지 4월의 굴라면이 아니며, 내가 지금 욕망하는 것은 4월에 먹는 굴라면, 즉 라멘집의 사계절이 금지한 바로 그 굴라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굴라면, 굴튀김으로만 존재할 수 있도록 운명지어진 4월의 굴이 그 운명을 거역하고 라멘 위에 떠오르는 일이며, 그러나 라멘집의 주인은 그 욕망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고, 들어줄 수 없으며, 들어줘서도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가 들어주는 순간 라멘집의 사계절은 무너지고, 사계절이 무너진 라멘집은 더 이상 라멘집이 아니라 그저 굴을 파는 가게, 음식학적 신학을 상실한 가게, 우주의 자의적 질서가 사라진 가게가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결국 나는 4월의 카운터에서 굴튀김을 씹으며, 라멘집이 지키는 그 작은 우주의 질서가 사실은 자연의 어떤 질서보다도 더 엄격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엄격함 앞에서 한 명의 굴 애호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굴튀김을 시키고, 굴튀김 값을 치르고, 굴라면을 먹지 못한 채로 가게 문을 나서는 일뿐이라는 것을, 천천히, 튀김옷이 이에 부서지는 속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