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therialisX@AetherialisX
분야를 떠나 사람들을 오래 보다보면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하나의 패턴이 있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형성한 세계관 바깥의 것들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이해하려 하기보단 훨씬 단순한 방식으로 정리해 버린다. 보통은 그 대상이 사기꾼이거나 혹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흐른다. 이렇게 규정하는 순간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낯선 것을 이해하려면 기존의 전제를 흔들어야 하지만, 비정상으로 분류해 버리면 그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이런 반응은 판단이라기보단 자기 보호에 가깝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전부라는 전제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이해되지 않는 것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일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일수록 의외로 매우 용감하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이 전부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영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도 싫어하고, 많은 경우 그럴 능력조차 갖추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들이 보이는 확신과 공격성은 실제 용기라기보다는 인식의 범위가 좁기 때문에 생기는 착시에 가깝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몇 개의 코드만으로 세상의 모든 상황을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당연히 두려움이 적을 수밖에 없다. 미지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을 진짜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악의만이 아니다. 좁은 세계관을 절대적인 현실로 착각한 채 움직이는 단순함 역시 충분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한때 이런 일이 있었다.
신뢰할 수 있는 지인들이 부탁하면 내 네트워크를 이용해 도와주는 일들이 있다. 메인 비즈니스가 아닌 그저 내가 연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 돕는 것에 가깝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나의 레퓨테이션과 나의 네트워크의 레퓨테이션 또한 달려 있기 때문에 높은 가격을 매긴다.
다만 내가 받는 금액은 보통 그 회사가 얻게 되는 이익에 비하면 몇십 배 이상 차이가 나기에 서로에게 불합리한 구조는 아니다. 오히려 그 비용으로 얻는 결과를 생각하면 싸다고 느끼는 쪽이 훨씬 많다.
말한대로 이런 일은 연결 그 자체보다 신뢰와 레퓨테이션이 핵심이라 아무에게나 해주지는 않는다. 내 이름과 네트워크, 내가 쌓아온 판 전체가 걸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돈 몇 푼 때문에 신뢰를 소모하는 식의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언제나 노력한다.
지인의 요청으로 한 회사를 들여다보니 괜찮은 곳이었다. 그래서 진행을 결정하고 프로세스를 돌린 뒤 청구서를 전달했다. 이런 건은 구조를 아는 사람에게는 복잡할 게 없고, 어디가 막혔고 어디를 열어야 하는지, 누가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면 하루면 정리되고, 그냥 적절한 사람을 연결시키면 끝나는 문제였다. 실제로 이 건 또한 하루면 끝나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그 회사 대표가 나를 일종의 브로커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답변은 계속 미뤄졌고, 뒤에서는 다른 "브로커"들에게 가격을 받아보고 있었다. 이미 프로세스는 돌아가고 있는데도 아무 설명 없이 시간을 끌었다.
판의 구조를 모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연결의 가격만 본다. 그 뒤에 누가 어떤 리스크를 지고 움직이는지, 누가 어떤 이름을 담보로 판을 여는지 같은 것은 보지 못한다.
결국 그는 나 몰래 다른 루트로 진행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미 우리 쪽에서는 다른 루트로는 진행이 불가능하도록 필요한 장치들을 다 걸어 둔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어떤 판 위에서 움직이는지도 모른 채, 이미 잠겨 있는 문을 향해 계속 손잡이만 돌리고 있었던 셈이다.
그제야 메시지가 왔다. 자기소개도 상황 설명도 없었다. 단지 다른 곳과 진행하려는데 우리 쪽이 홀딩을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보상을 해 줄 테니 당장 드롭하라는 식이었다. 말투에는 기본적인 맥락도, 최소한의 예의도,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자각도 없었다.
메시지를 읽고 웃음이 났다.
이 사람은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어디까지가 거래 가능한 영역이고 어디부터가 신뢰의 문제인지, 그 기본적인 선조차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예의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예의 없는 사람은 바로 잘라낸다. 나에게 예의는 단순한 매너가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리스펙트와 연결된 문제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도 존중하지 않고, 관계를 오직 거래로만 읽는다.
그런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자기 계산이 닿지 않는 영역에서 크게 깨지기에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주 정중하게 답장을 보냈다. 내가 한국어로 글을 쓸 때는 상대를 상당히 배려할 때다. 아주 캐주얼한 상황이나 정말 정리해야겠다고 판단했을 때는 영어를 쓴다.
당신은 예의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브로커가 아니며, 당신이 요청했던 일 역시 내가 신뢰하는 사람의 부탁이었기에 진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의 없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다가 일이 막히자 이제 와서 돈 몇 푼 줄 테니 꺼지라는 식의 태도는 가소롭기까지 하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 혼자서는 절대 진행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공적인 상황에서는 감정적으로 욕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오히려 상대가 도망칠 구멍이 없도록 구조를 정확하게 짚어 주는 쪽을 택하려 한다. 그쪽이 훨씬 잔인하고 정확하며 오래 남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쪽에서는 난리가 났다고 한다. 어디 이름도 모르는 놈이 자기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냐며 아주 조져 버리겠다고 했단다. 그러면서 내 뒷조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재미있는 점은 그 모든 움직임이 다시 내 쪽으로 보고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세계에서 통하던 방식이 다른 세계에서도 통할 것이라고 믿는다. 익숙한 영역에서는 무례가 효율처럼 작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서 있는 판보다 더 넓은 판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는 모든 움직임은 오히려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자백이 된다.
그는 내 뒷조사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상은 자기 수준을 보고서 형태로 제출하고 있었을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공손한 메시지가 도착했다. 말투가 달라졌고 처음에는 없던 사과 비슷한 문장도 생겨 있었다. 사실 나에게는 그다음이 더 번거로웠다. 내 쪽의 사람들이 그 회사를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그걸 말리느라 시간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통쾌하다고 느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저 전형적인 인간의 오만과 무지, 그리고 뒤늦은 공포가 만들어낸 익숙한 장면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 사람 역시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에서는 이런 방식이 계속 통했을 것이다. 상대를 얕보고, 가격을 찔러보고, 문제가 생기면 돈으로 정리하는 것들이 그 사람의 세계에서는 그게 능력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자신이 알고 있는 층위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자기가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은, 그 바깥의 구조와 충돌하는 순간 항상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상대를 정신병자로 몰아 상황을 단순화하려 한다. 그래야 자신의 패배를 현실의 복잡성이 아닌 상대의 비정상성으로 밀어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착각은 보호막이 아닌 족쇄가 될 뿐이다.
이런 모습은 여기 플랫폼에서도 자주 보인다. 내 글의 핵심에는 반응하지 못하고, 글이 건드린 자기 내부의 불편함에만 반응한다. 개념을 이해할 수 없으니 사람을 프레임으로 처리하고 캐릭터를 만들어 공격한다.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진실을 논박하지 못한다. 대신 진실을 말하는 사람의 정신 상태를 문제 삼는 방식으로 우회한다. 그것이 가장 저렴한 방어이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습성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집단의 작동 방식이 될 때, 그리고 그 집단이 제도가 될 때, 같은 회로는 훨씬 정교한 외피를 두르고 나타난다. 종교 역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자신을 포함해 다른 이들의 정신승리에 동조할 생각이 없다. 종교라는 외피를 두른 채 제공되는 보편적인 위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사람들이 내 글을 보며 즉각적으로 방어 기제를 작동시키는 것과, 제도 종교가 진실을 마주한 인간을 억압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주파수의 현상이라 생각한다.
흔히 말하는 “그리스도 의식”, 정확히는 “Christ Consciousness”는 종교가 아닌 하나의 주파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목격해 온 2000년의 제도적 종교는 해방의 메시지 위에 세워진 가장 정교한 정치 구조물이다. 진리를 없애 버린 것이 아닌 구조 안에 가두고, 허가된 방식으로만 접근하게 만든 것이다.
사랑은 교리로 바뀌고, 자각은 복종으로 바뀌며, 내면의 직접적인 앎은 외부 권위에 대한 의존으로 바뀐다.
인간이 스스로를 기억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 망각 위에 질서를 세운다는 지점에서 종교와 구조의 본질은 완전히 겹친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회사 대표가 자신의 좁은 세계관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비정상”으로 몰아넣듯, 구조 역시 자신의 통제 바깥에 있는 자각을 위험하거나 이상한 것으로 분류해 격리한다.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 의식”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아 주권, 그리고 자신의 신성을 완전히 자각하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나약한 온정이 아닌 공포보다 높은 차원의 질서에 자신을 맞추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자아 주권 또한 외부의 승인 없이 자신의 중심에서 움직이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이 영적인 경험을 하는 육체가 아닌 반대로 인간이라는 경험을 하고 있는 영적 존재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생각의 전환은 삶 전체의 연산 방식 또한 바꾸게 만든다.
자신을 육체에 부속된 존재로 이해하면 공포와 결핍의 문법에 갇히지만, 자신을 인간이라는 경험을 통과하는 의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삶은 더 이상 생존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이때부터 선택의 기준이 바뀌고, 구조가 설계한 공포의 레이아웃이 무력해지는 것을 느낀다.
구조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저항이나 투쟁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관리하고 분열시키는 데 익숙하다.
구조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설계해 놓은 공포의 문법 자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인간들이라 생각한다. 공포를 먹이로 삼는 구조는, 공포를 거부하고 이미 자기 안의 충만함을 기억해 낸 존재 앞에서 연산이 멈출 뿐이다.
이 부분에서부터는 조작당하거나 분열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구조가 근본적으로 사람들을 진영과 계층, 정체성으로 쪼개는 이유는 본질을 잊은 인간만이 그렇게 잘게 분할될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반대에 있는 인간은 여러 역할을 수행할 수는 있어도 그 역할들로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는다.
이것이 구조가 만들어 놓은 잠금장치를 무력화하는 가장 근본적인 해방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다수의 안도감이 아닌 소수의 각성이다. 그리고 그 각성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닌 안에서부터 기억나는 것이라 믿는다.
이것들은 원래부터 나의 것이었다고 믿을 뿐이다.